어제 밤 피곤한 몸을 풀기 위해 목욕물을 받다가 그만 잠들고 말아 물이 넘쳐 욕조를 넘어방바닥을 적시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있는 수건들로 물기를 뺐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첫 날밤은 물과의 전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아침 일찍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는 일정이 버거웠지만, 십자가의 길인 비아돌로로사를 향한 마음을 누를 수는 없었습니다.
호텔의 풍성한 아침 식사로 든든히 배를 채우고 예루살렘 성으로 향하였습니다.
일행이 내린 곳은 예루살렘 성의 8개 문 중 동쪽에 위치한 사자의 문이었습니다. 성문의 양편으로 두 마리의 사자문양이 새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에서는 이 문을 스테반의 문이라고 일컫는다고 합니다. 교회의 첫 순교자인 스테반이 성문 가까운 곳에서 순교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이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스데반 순교 기념교회가 세워져 있습니다.
스데반의 문으로 들어간 예루살렘 성의 지역은 이슬람교도 구역이었습니다.
현재 예루살렘 성은 이슬람교도 구역, 유대인 구역, 기독교인 구역 그리고 아르메니아인 구역으로 구분돼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길은 이슬람교도 구역에서 시작하여 기독교인 구역인 골고다 언덕으로 이어집니다. 3대 종교의 성지라고 하는 사실이 실감 나는 현장이었습니다.
스데반의 문을 지나자마자 오른편에 위치한 교회건물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38년된 병자가 누워있던 베데스다 연못 유적지 였습니다.
지금은 연못의 흔적만 남아있을 뿐이었습니다. 오랜 전쟁의 역사 가운데 파묻혀 버린 것입니다.
38년 동안 베데스다 연못의 기적만을 믿고 살아온 그이지만 스스로 걸을 수도 없는 처절한 현실 또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그가 누워 있던 베데스다 연못을 내려 다 보았습니다.
천사가 내려와 물이 동하는 순간 먼저 들어가는 사람에게 치유의 기적이 일어난다고 하는 속설에 온갖 병자들이 몰려왔고 물이 동하는 순간 서로 먼저 들어가려고 아귀다툼을 하는 곳이었습니다.
원래는 제사에 바칠 희생제물을 깨끗이 씻는 용도로 만든 연못인데 어느 순간부터 사람도 치유된다고 하는 허망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눈 앞에 있는 베데스다 연못은 한마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베데스다 연못을 둘러 둘러 앉아있는 병자들은 바로 ‘나’였습니다.
허망한 소문에 들떠 그저 먼저 들어가서 한 몫 챙겨 보려는 마음에 남보다는 무조건 앞서야만 하는 강박관념에 사는 우리네의 현장이 베데스다입니다.
행각의 흔적만 남아 있을 뿐 아무것도 없는 유적지 베데스다는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고 있는 세상의 끝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베데스다 연못에 서 있는 나에게 예수님은 다가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느껴봅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베데스다 연못 유적지를 나와 얼마 되지 않은 곳에 있는 교회로 들어갔습니다. 그 곳이 십자가의 길, 비아돌로로사가 시작되는 예수님께서 채찍을 맞으신 곳이었습니다.
순간이었습니다. “들고 온 네 자리를 펼 곳이다.” 라는 주님의 음성이 떠올랐습니다.